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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
감독 : 오멸
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
(지슬은 제주도 사투리로 '감자'라는 말이다. 참고로 감저는 제주도에서 고구마를 뜻한다.)
현재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 중에 <4.3사건>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제주도 사람 중에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관광객의 눈으로 바라본 제주는 아름다운 관광지이지만, 제주도의 유명한 관광지는 대부분 4.3사건 당시 학살터였다.
제주도의 중산간 마을은 소개령이 내려졌고 사람들은 소개령을 피해 삶의 터전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낮이면 경찰과 군인들에게 폭도로 몰리고, 밤이면 산에서 내려온 무장대에게 목숨이 붙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과 군인의 동조자로 오인받아 목숨을 잃었다. 제주도 전체를 빨갱이섬으로 몰아 1948년부터 1956년까지 빨갱이 토벌 작전으로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당시 제주도민의 10%에 해당하며 그 중 여성과 노인, 10세 미만의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이 90%이상이었다고 한다.
"무력충돌과 진압의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 되었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자랑스런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 나가야 합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국가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그랬을 때 국가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확보되고, 그 위에서 우리 국민들이 함께 상생하고 통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6. 4. 3.
제 58주년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서
노무현대통령의 추도사 中
4월이 오고 있다.
빨갱이 물감이 칠해진 4.3사건은 오랜 세월 언급조차 금기시 되어 오다가 1998년 김대중대통령이 처음으로 CNN과의 인터뷰에서 4.3에 대한 발언을 했다. 그리고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권력에 의해 행해진 대량학살"이라며 대통령으로 처음 위령제에 참석해 사과를 했다.
그리고 60년 가까이 봉인되었던 4.3 유해발굴사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정권이 바뀌면서 예산 삭감으로 4.3사건 유해발굴사업은 중단되어버렸다. 발굴사업 뿐 아니라 발굴된 뼈에 대한 감식사업 조차도 진행되었다.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한 유족들이 많고 제대로된 진상규명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예산지원이 없어 사업이 중단된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속만 태울 수 밖에 없었던 많은 유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4.3사건에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발굴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시 정부적인 지원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유족과 희생자에게는 이 영화가 위령제가 되었으면 한다.
대한민국의 뜨거운 감자 제주 4.3
제주 4·3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5.10 총선을 막아내려 했던 제주 민중들의 항쟁과 이에 대한 미군정 당시의 군인과 경찰들, 극우 반공단체들의 유혈진압을 말한다. 제주 4.3의 시발점이 된 1947년 3월 1일부터 사실상 7년 7개월간 이어졌으며, 이로 인해 약 3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사살당했다. 마을이 통째 불타 사라지기도 했다.
1948년 3.1절 발포사건
1948년 3월 1일, 경찰은 5.10선거를 반대하는 제주도민들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일반 주민이었다. 미군정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정당방위로 주장했고 민심수습을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주섬 사람들을 ‘폭도’로 몰았다. 이 사건이 4.3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됐고,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4.3 무장봉기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 발포사건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7년 7개월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로 비화되었다. 미군정은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이제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1948년 11.17 계엄령 선포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출처 : 제주4.3 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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